예술혼을 위하여(160)-‘미소라 히바리’와 ‘미야코 하루미’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2/14 [07:54]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한 진원지를 살펴보면 그 내용을 소문으로만 간과하기에는 이를 언급한 인물들이 한국과 일본의 가요계에서 너무나 비중이 큰 인물들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소라 히바리’가 1989년 6월 세상을 떠난 후 국내 잡지 ‘주간 여성’에 게재된 ‘미소라 히바리 그는 한국인이었다.’ 특집기사는 작곡가 ‘손목인’(1913~1999)이 일본의 재일 한국계 가수 ‘미야코 하루미’(北村春美. 1948~)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인 기사였습니다.

 

이러한 작곡가 손목인은 1932년 도쿄 제국음악학교를 거쳐 도쿄 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한 후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이후 1952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구가야마 아키라’(久我山明), ‘스에요시 켄지’(末吉賢次), ‘쓰카사 준키치’(司潤吉) 라는 예명으로 빅터레코드사 등에서 1957년까지 유명한 작곡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1955년 일본에서 작사가 ‘오다 히사오’ 大高ひさを. 1916~1990)가 작사한 ‘카스바의 여인’(カスバの 女) 이라는 노래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곡은 원래 ‘심야의 여인’(深夜の女)이라는 영화 주제가로 만들어졌으나 영화제작이 중단되면서 여가수 ‘에도 쿠니에다’(エト邦枝. 1916~1987)가 발표하였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고 묻혔던 노래입니다. 이후 1967년 스페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혼혈가수 ‘미도리가와 아코’(緑川 アコ. 1947~)와 여가수 ‘사와 다마키’(沢たまき. 1937~2003)가 연이어 리메이크하면서 큰 반응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한국에서도 가수 패티김에 의하여 같은 곡 ‘카스바의 여인’이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으로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오늘날 많이 불리고 있는 작곡가 장경수가 작사하고 이호섭이 작곡하여 가수 윤희상(1955~2017)이 노래한 또 다른 ‘카스바의 여인’은 전혀 다른 노래입니다. 가수 윤희상은 국민가요 칠갑산을 최초로 노래한 가수입니다. 당시 빛을 보지 못하고 이호섭이 작곡한 ‘카스바의 여인’으로 가수의 반열에 올랐으나 2017년 애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손목인 이 1955년 작사가 ‘오다 히사오’가 새롭게 작사한 일본어판 ‘목포의 눈물’(木浦の涙)을 발표합니다. 잠시 이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가수 이난영이 부른 민족의 애환을 담은 노래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오케레코드’와 ‘조선일보’가 주최한 우리 노래 가사 모집에서 당선된 ‘문일석’(본명-윤재희 추정?~1944)의 가사를 작곡하여 탄생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당시 1936년 일본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던 노래로 이와 같은 연장 선상에서 1955년 같은 곡에 일본어 가사 ‘목포의 눈물’(木浦の涙)이 다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작곡가 손목인의 평가에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맥락을 읽게 합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타향살이’와 ‘목포의 눈물’과 같은 민족의 아픔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일본의 군국주의 정신을 부추기는 노래를 만들어 발표하였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1999년 1월 도쿄 어느 호텔에서 타계하였습니다. 

 

▲ (좌로부터) 미소라 히바리, ‘미야코 하루미’의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 앨범 ‘이즈오섬’(伊豆大島) 이미자 동백아가씨 영화주제가 앨범 출처: https://google.co.kr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작곡가 손목인은 일본의 가요계에 익히 알려진 작곡가로 또한, 일본 가요계의 주요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었다고 이야기한 일본의 한국계 여가수 ‘미야코 하루미’ (北村 春美. 1948~)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미야코 하루미’는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났습니다. 타고난 재능을 살핀 어머니의 후원으로 어려서부터 일본 전통무용과 발레를 배웠습니다. 그는 1964년 가수의 등용문인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제14회 가요콩쿠르에서 우승하여 1964년 ‘곤란한 거예요’(困るのことヨ)라는 노래로 데뷔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발표한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アンコ椿は 恋の花)이라는 노래가 대 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 노래는 일본 이즈반도(伊豆半島)의 동백꽃으로 유명한 ‘이즈오섬’(伊豆大島)을 무대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여기서 노래 제목 ‘앙꼬 동백꽃’(アンコ椿は)은 단팥으로 통용되는 앙꼬(アンコ)가 아닌 언니(姉娘)의 뜻을 가진 일본의 전래적인 단팥 딸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아가씨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당시 이 곡은 백 만장이 넘는 레코드가 팔렸으며 일본의 가장 권위가 있는 제6회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미야코 하루미’(1948~)의 히트곡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이 1964년 10월 발표되기 3개월전인 1964년 7월 우리나라에서 이미자(1941~)의 ‘동백 아가씨’가 발표되었던 사실입니다. 당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는 ‘김기’ 영화감독이 제작한 ‘신성일’ ‘엄앵란’ 주역의 영화 ‘동백 아가씨’의 주제가이었습니다. 작사가 한산도가 가사를 쓰고 작곡가 백영호가 만들었던 노래로 1964년 7월 영화 주제가 음반으로 발표하면서 앨범 뒷면에 실린 노래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연을 가진 동백 아가씨가 가요의 여왕 이미자를 만드는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이 노래는 1965년 왜색풍의 가요라는 명목으로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국민의 뜨거운 사랑으로 국민가요로 남았습니다.    

 

‘이미자’와 ‘미야코 하루미’의 노래는 전혀 다른 노래로 3개월 간격으로 발표되어 한국과 일본을 동백꽃 노래로 뒤흔든 일본 가수 또한, 재일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야코 하루미’의 ‘이즈오섬’(伊豆大島)을 무대로 만들어진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アンコ椿は 恋の花)은 다음과 같은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섬 처녀의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노래입니다.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アンコ椿は 恋の花) 가사

사흘 늦은 편지를 싣고서(三日おくれの 便りをのせて)/ 배는 떠나가네 하부항구(船が行く行く波浮港)/ 아무리 좋아해도 당신은 멀어(いくら好きでも あなたは遠い) / 바다 저편에 가버렸을 뿐(波の彼方へ 去ったきり) / 아가씨 편지는 아가씨 편지는(あんこ便りは あんこ便りは) / 아 아 한쪽만의 편지(あ あ 片便り)

 

당시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가수의 노래임에도 일약 대 히트곡으로 부상한 내용을 살펴보면 노래에 담긴 감성이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정서와 맞닿은 점이 살펴집니다. 이와 함께 ‘미야코 하루미’의 시원한 음색으로 힘차게 뻗어가는 신선한 신인의 가창력이 큰 몫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미야코 하루미’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해가 갈수록 창법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살피게 됩니다. 이는 노랫 말에 담긴 감성적인 분위기를 중시한 초기의 창법에서 해가 갈수록 더욱 힘이 실린 역동적인 창법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러한 변화가 이 노래의 표면적인 가사에 담긴 감성과는 별도로 노래의 주요한 무대이었던 ‘이즈오섬’(伊豆大島)의 역사적인 이야기와 연관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는 일본인이라면 ‘이즈오섬’(伊豆大島)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그림책 이야기이거나 학교 교육을 통하여 누구나 익히 배워온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이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노래의 무대가 되었던 ‘이즈오섬’(伊豆大島)은 아스카시대의 ‘덴무 천황’(天武天皇. 6231~686) 이전부터 에도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유배지로 알려진 섬입니다. 이 섬에 담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일본 에도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요미혼’(読本) 작가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 1767~1848)이 ‘친세쓰유미하리즈키’(椿説弓張月)1807~1811)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요미혼’(読本) 이란 역사적인 전설과 야사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는 그림책과 같은 형식의 소설인 ‘구사조시’(草双紙)와 반대되는 개념의 문자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체 소설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일본의 문학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작가 ‘교쿠테이 바킨’은 하이쿠 시인 ‘고시카야 고잔’(越谷吾山. 1717~1788)에게 시를 공부하였습니다. 이후 1790년 당시 가장 유명한 ‘게사쿠’(戲作) 작가 ‘산토 교덴’(山東京傳. 1716~1816)의 문하에 입문하여 청출어람의 문학사를 남긴 작가입니다. ‘게사쿠’(戯作) 란 쉽게 에도 시대에 생겨난 통속적인 오락 소설을 말합니다. 이는 중국의 당나라가 무너지고 송나라가 부흥하던 시기에 서민계층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읽기 쉬운 구어체의 소설 백화 소설(白話 小說)이 등장한 배경과 같은 맥락입니다.

 

‘교쿠테이 바킨’의 스승 ‘산토 교덴’은 일본의 문예 사에서 뛰어난 감성을 가진 가장 중심적인 작가로 한때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 생활도 경험하였던 작가입니다. 그는 중국의 백화소설과 같은 이야기체 소설 ‘요미혼’(読本)과 통속적인 소설 ‘게사쿠’(戯作)에 이어 헤이안 시대에서 가마쿠라 시대에 이르는 풍경과 풍속 미술의 ‘야마토에’(大和絵)와 에도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목판회화 예술 ‘우키요에’(浮世繪)의 역사를 정리한 ‘부세회류고’(浮世繪類考)를 펴냈습니다.

 

이와 같은 스승을 두었던 ‘교쿠테이 바킨’이 1807년부터 1811년까지 ‘친세쓰유미하리즈키’(椿説弓張月)라는 소설을 펴냅니다. 이 소설은 에도 말기의 대표적인 우키요에 작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 1760~1849)의 목판화 작품이 담겨있습니다. 에도 말기의 우키요에 작가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에도 중기의 대표적인 우키요에 작가인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1725~1770)의 제자이며 ‘스즈키 하루노부’는 우키요에의 다색 목판화를 창시한 ‘카츠가와 슌쇼’(勝川春章. 1726~1793)의 제자입니다.

 

이와 같은 ‘교쿠테이 바킨’의 소설 ‘친세쓰유미하리즈키’(椿説弓張月)는 유구국의 정사인 1650년경 편찬된 사서 ‘중산세감’(中山世鑑)과 1531년부터 1623년까지 수집된 가요집(歌謡集) ‘오모로사우시’(おもろさうし)에 담긴 헤이안 시대의 전설적인 무사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가 ‘이즈오섬’(伊豆大島)에 유배되어 온갖 시련에도 죽지 않고 유구국(오키나와)으로 도피하여 그의 아들이 유구 왕국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이루어진 소설입니다.

 

이와 같은 오키나와(沖繩) 일대에서 번영하였던 왕국 유구국(琉球國)은 일본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와도 많은 연관성을 가진 왕국입니다. 유구국은 예로부터 동남아에서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에 중계무역을 하였던 나라로 삼국으로 나뉘었던 왕국이 1429년 통일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쓰마 번’(薩摩藩) 의 침공을 시작으로 1879년 멸망되어 오늘날의 오키나와로 강제 합병시킨 것입니다. 일본은 이러한 유구국(오키나와)에 담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구국과 일본은 그 뿌리가 같다는 논리를 앞세워 1921년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가 상륙비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유구국이 역사적으로 우리와 연관된 많은 이야기와 2차 대전 종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유구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던 내용과 같은 많은 이야기는 필자가 별도로 다룰 것입니다.
 

▲ (좌로부터) ‘친세쓰유미하리즈키’(椿説弓張月) ‘이즈오섬’(伊豆大島)유구국(琉球國) 지도 오키나와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 신인가수 ‘미야코 하루미’(北村春美. 1948~)는 이러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품은 ‘이즈오섬’(伊豆大島)을 배경으로 한 노래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アンコ椿は 恋の花)을 발표한 이후 탄탄한 유명가수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하루미’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작곡가 손목인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의 재일 한국인 설을 가수 ‘미야코 하루미’’(北村春美. 1948~)에게 직접 들었다는 기록을 남긴 채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 ‘히바리’보다 11살 아래인 ‘미야코 하루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인이며 자신의 본명이 이춘미(李春美)라는 사실을 밝힌 가수입니다. ‘미야코 하루미’는 인기 절정의 가도를 달려가던 1984년 돌연히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후 1987년 한국의 가수 김연자(金蓮子. 1959~)의 프로듀서가 되어 일본 활동을 지원합니다. 이에 김연자는 제2의 ‘미소라 히바리’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 가요사에 우뚝 서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야코 하루미’가 1989년 6월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아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가요계 복귀를 선언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살펴 가기로 합니다.

 

'미야코 하루미'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LjHt4siM6Wk 
다음 칼럼은 (161) ‘재일 한국인 가수 ‘미야코 하루미’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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