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지켜온 역사와 인물

일본 정부, 요시아키 내각부 정무관(차관급) 파견 "한국의 독도 점거는 불법이며 용인할 수 없다, 독도는 일본 영토" 망언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1/02/25 [12:59]

▲ 독도     © 이일영 칼럼니스트

 

일본의 지자체 시마네현은 우리의 영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매년 2월 22일 (다케시마(竹島) 날)이라는 행사를 한다. 지난 22일 열린 행사에 일본 정부는 요시아키 내각부 정무관(차관급)을 파견하였다. 그는 (한국의 독도 점거는 불법이며 용인할 수 없다)면서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망언을 쏟아 놓았다.

 

일본은 우리의 영토 독도를 다케시마(竹島) 즉 대나무 섬이라 한다. 이와 같은 명칭에서 진실과 허구는 쉽게 판명된다. 역사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명칭은 신라 제22대 왕 지증왕 시대인 512년 이사부(異斯夫) 장군에 의하여 오늘날 울릉도를 거점으로 존재한 작은 세력국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통합되면서 우산국 도서 섬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과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우산도(于山島)로 이어졌다. 

 

또한, 멀리 보이는 독도 봉우리가 세 개인 점에서 삼봉도와 바다사자(물범) 종류인 강치 서식지를 이르는 한자 표기 가지도(可支島)로 기록되어왔다. 이와 함께 오랜 역사 속에서 바위로 된 섬을 이르는 돌섬 또는 경상, 전라의 방언 (독섬)으로 불려오면서 1900년 고종 황제 칙령으로 울릉도에 속하는 섬 한자 표기 석도(石島)로 기록되었다. 이후 일본 기록에는 1904년에 우리나라 현존 기록은 1906년 울릉도 군수 심흥택이 강원도 관찰사 서리 이명래에게 보낸 보고서에 독도(獨島)가 처음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야 할 내용은 일본의 주요한 역사 기록에는 예로부터 일본이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기록하였으며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로 기록하여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장 잘 알려진 기록으로 1667년 일본 운주(雲州) 지방 제후인 사이토 호센(齋藤豊仙)이 편찬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가 있다. 이는 일본의 시마네반도 북쪽 60km 거리의 4개 큰 섬과 18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오키군도를 이르는 은주(隱州)를 관찰 중 표류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살피게 된 기록이다. 바로 이와 같은  최초 기록에서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로 기록하고 있다. 나아가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며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 사실이다.

 

이어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 사법과 입법 행정을 담당한 최고 국가 기관 태정관(太政官)의 지령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国交際始末内探書)는 조선과의 관계에 대한 시작과 끝에 이르는 비밀문서라는 의미이다. 이는 외교관 사다 하쿠보(佐田 白茅)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가 조선 수교 밀명을 받아 1870년 4월 부산 초량에 설치된 무역지구 왜관(倭館)에 도착하여 예비회담을 열었던 당사자로 당시 조선을 정탐한 내용의 보고서이다. 이와 같은 보고서에서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로 표기하며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두 일본 메이지 초기 외교관은 조선침략 정한론 주창자로 그중 모리야마 시게루는 1875년 다시 내한하여 동래부사 박제관과 수교 통상 교섭 회담을 열었으나 결렬되었다. 당시 일본은 이와 같은 상황을 예견하여 불순한 계획을 미리 세우고 있었다. 이는 일본이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 운요호(운양호)를 회담 중 부산에 보낸 것이다. 조선과의 수교 교섭이 지연되는 이유를 알아보려고 왔다는 명목이었지만, 운요호는 동해안에 이어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 강화도 앞 난지도에 기항하여 결국 운요호사건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무력적인 위협을 바탕으로 민족의 아픔을 예시한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바탕의 장본인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마쓰시마 (松島)로 기록하고 불러온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불러온 울릉도와 바꾸어서 억지를 부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우리는 너무나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 바로 일본의 역사서와 우리나라의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과 연관된 대나무 섬 죽도(竹島)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항에서 북동쪽으로 4㎞ 지점에 있는 대나무 섬 죽도(竹島)로 오늘날 그대로 존재하는 죽도이다. 이는 바로 일본이 역사적으로 다케시마(竹島)로 인정하여온 울릉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스스로 어처구니없는 짓이라는 것을 익히 알기에 독도를 다케시마로 바꾸어 억지를 부리는 망동을 자행하고 있다.  

 

▲ 1696년 숙종실록     ©이일영 칼럼니스트

 

별첨한 자료는 1696년 숙종실록에 기록된 조선의 어부이며 민간 외교관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민족의 의인 안용복이 1696년 5월에서 8월 사이 오늘날 시마네현인 호키주(伯耆州)에 건너가 울릉도인 다케시마(竹島)와 독도인 마쓰시마(松島)가 우리의 영토임을 확인한 기록이다. 

 

이와 같은 역사를 안고 민족의 영토 독도를 지킨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먼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어머니 홍라희 리움 미술관 전 관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아버지로 중앙일보를 창간한 고 홍진기 대표의 세계 속에 소중한 민족의 영토 독도의 주권을 알린 선구적 혜안과 정신은 오늘날 일본의 망동에 비추어 재조명되어야 할 내용이 분명하다. 그는 친일명부에 등재된 인물이다. 그의 친일 행적을 살펴보면 1940년 서울대 전신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1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이후 판사로 발령되기 전 경성제대 법학과 조수(조교) 시절 ‘주식회사의 합병에서의 교부금’(株式會社の合併における交付金)이라는 논문을 경성제대 법학회 논집에 게재한 내용이 있다. 당시 그의 논문은 경성제대 역사에서 학술지 논문 게재 조선인은 단 2명 중 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논문 내용은 회사의 합병 시에 주식과 함께 일정액의 금전을 피합병회사의 주주에게 지급하게 되는 금전을 합병교부금이라 한다. 여기서 다양한 형태로 제공될 수 있는 제반 금전에 대하여 합병교부금의 인정에 대한 범주와 함께 그 법리적 논쟁은 오늘날에도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당시 그는 이에 대하여 놀라울 만큼 명쾌한 논리를 담아 일본 학자들이 극찬하였다. 정치적이거나 역사의 관점을 담은 논문이 아닌 상법 내용으로 일본인도 극찬한 논리적인 논문이 창씨개명된 이름으로 게재하였다 하여 친일 행적인 점은 헤아려야 할 부분이 많다. 특히 그가 일제 패망 이후 열린 한일협상 대표로 활약하면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자행한 역사적 잘못을 명쾌한 논리로 파헤쳐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대상이었음은 많은 연구와 이에 따른 평가가 필요하다.  

  

고 홍진기 대표는 일제 패망 이후 1954년 2월 법무부 차관에 임명되어 5월에 열린 제네바 평화회담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당시 그는 최초의 평화 통일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 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을 제출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상세하게 헤아리면 시대를 앞서간 역사의식을 분명하게 재평가하게 한다.

 

당시 그는 여러 협약에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미국과 일본의 협약을 통하여 일본에 유리한 조문이 작성되는 문제에 명쾌한 국제법 논리로 이를 차단하였다. 이후 독도에 접안 시설과 등대를 설치하고 태극기를 게양해야 하는 국제법을 중시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는 오늘날 일본의 만행을 분명하게 예상한 혜안이다.     

 

이와 함께 삼성문화재단 후원으로 1997년 8월 8일 울릉도에 개관된 독도박물관은 너무나 소중한 역사의 공간이다. 박물관이 탄생하기까지 일생을 통하여 사료를 수집하고 초대 박물관장을 역임한 서지학자 고 이종학 관장에 대한 이야기도 소중한 내용이 많다. 

 

또한, 우리 역사에 독도를 그린 화가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 1977년 독도를 찾아 겨레의 진경 정신으로 독도를 그려낸 이후 평생을 독도에 바친 5만원권 지폐 신사임당 초상화가로 잘 알려진 예술원 회원 이종상 화백의 투철한 민족의식 또한, 영원히 보전해야 할 유산이다. 틈나는 대로 이를 정리할 것이다.    

    

끝으로 일본 정부와 지성인들에게 고한다. 이와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실증적인 민족의 영토 독도를 명칭을 바꾸는 터무니없는 술수로 자국의 영토라고 망언하고 자행하는 그릇된 행동이 훗날 후손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짐을 물려주는 역사의 과오가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독도를 지켜온 우리 민족의 소중한 정신이 사상누각과 같은 그대들의 교활한 술수가 실로 측은한 허상임을 또렷이 일깨우게 할 것이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이다. [Below is the [full text] of an English article translated from the above article with Google Translate.]

 

History and People Who Protected Dokdo

-Poet Lee Young-il

 

Shimane Prefecture, a local government in Japan, holds an event called (Takeshima Day) every February 22nd, claiming sovereignty over Dokdo in our territory. At the event held on the 22nd, the Japanese government sent Yoshiaki's Cabinet Officer (Vice Minister). He said (Korean occupation of Dokdo is illegal and unacceptable), and poured out the remark that Dokdo is Japanese territory.

 

Japan calls Dokdo, our territory, Takeshima, or Bamboo Island. In a name like this, truth and fiction are easily revealed. Historically, our name for Dokdo was in the era of King Jijeung, the 22nd king of Silla, in 512, in the era of King Jijeung, when the small power of Usan-guk, which existed as a base in Ulleungdo today, was incorporated into Silla. It was recorded in the Three Kingdoms as an island island. After that, it was followed by Usando (于山島) recorded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Annals of Sejong.

 

In addition, it has been recorded as Gajido (可支島) in Chinese characters from the point of three peaks of Dokdo that can be seen in the distance to the habitat of the sea lion, Sambongdo and the type of sea lion (seal). Along with this, in the long history, it was referred to as a stone island or a dialect of Gyeongsang and Jeolla (Dokseom), which means a rocky island, and was recorded as Seokdo (石島) in the Chinese character of the island belonging to Ulleungdo under the decree of Emperor Gojong in 1900. Since then, Japanese records have recorded Dokdo for the first time in 1904 in South Korea's existing record in 1906 in a report sent to Gangwon-do observer Seori Lee Myung-rae by Shim Heung-taek.

 

What we need to look at here is that it is undeniable that Japan recorded Ulleungdo as Takeshima and Dokdo as Matsushima in Japan's major historical records. The best-known record is Eunju City Cheonghapgi, edited in 1667 by Hosen Saito, the reign of Unju region in Japan (隱州視聽合記). This is a record of Ulleungdo and Dokdo by drifting while observing Eunju, which extends to the Oki Islands consisting of four large islands and 180 small islands 60km north of Japan's Shimane Peninsula. In this very first record, Ulleungdo was recorded as Takeshima and Dokdo was recorded as Matsushima. Furthermore, the important fact is that Ulleungdo and Dokdo were excluded from Japanese territory and recognized as Joseon's territory.

 

Following the Meiji Restoration in 1867, the order of Tae Jeong-gwan, the highest state agency in charge of judicial and legislative administration in 1870. It means that it is a secret document. Diplomats Sada Hakubo and Moriyama Shigeru received secret orders for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arrived at Waegwan, a trading district in Choryang, Busan in April 1870, and held a preliminary meeting. This is a report of the spying. In such a report, Ulleungdo is marked as Takeshima and Dokdo as Matsushima, and the fact that Dokdo is Joseon's territory is clearly recorded based on historical grounds.

 

These two Japanese diplomats in the early Meiji period were advocates of Jeonghanron theory of the invasion of Joseon, and Shigeru Moriyama visited Korea again in 1875 and held diplomatic and trade negotiations with Dongnae Vice President Park Je-kwan, but failed. At the time, Japan was predicting such a situation and was planning impure plans in advance. This is when Japan sent Unyo-ho (Un-Yo-ho), a modern-style warship imported from Britain, to Busan during the meeting. It was in the name of coming to find out the reason for the delay in diplomatic negotiations with the Joseon Dynasty, but the Unyo-ho made a call to Nanjido in front of Ganghwa Island after passing through the east and south coasts and the west coast, causing the Unyo-ho incident. Based on such an armed threat, he is the founder of the 1876 Treaty on the Protection of the Sick (Ganghwado Treaty), which exemplified the pain of the nation.

 

We are dealing with this ridiculous reality that Japan has historically recorded and imported Dokdo as Matsushima and replaced it with Ulleungdo, which was imported as Takeshima. Jukdo, a bamboo island related to Japan, recorded in the history books of Japan and the annals of the dynasty in Korea, is a bamboo island jukdo that exists today as it is, located 4km northeast from Jeodong Port, Ulleung-eup, Ulleung-gun, Gyeongsangbuk-do. This is exactly what Japan has historically recognized as Takeshima, and because he knows that forcing Ulleungdo as its own territory is ridiculous by itself, he is committing a mandate to change Dokdo to Takeshima.

 

▲ The Annals of King Sukjong, 1696 © Ilyoung Lee columnist

 

The attached data is a Korean fisherman recorded in the Annals of King Sukjong in 1696. A civilian diplomat who protected Ulleungdo and Dokdo by Ahn Yong-bok, who crossed over to Hokiju, Shimane prefecture today, between May and August 1696. This is a record confirming that Takeshima and Dokdo, Matsushima, are our territory.

 

There are precious people who have kept Dokdo, the territory of the nation, with such a history. First, the pioneering insight and spirit that informed the sovereignty of Dokdo, the territory of a precious nation in the world of the late CEO Hong Jin-ki, who founded the JoongAng Ilbo as the father of Leeum Museum of Art Hong Ra-hee, the mother of Samsung Electronics Vice Chairman Lee Jae-yong and the father of the Joongang Ilbo Chairman Hong Seok-hyun, is the mangdong of Japan today. It is clear what needs to be re-examined in the light of. He is a person on the pro-Japanese list. Looking at his pro-Japanese activities, he graduated from the Department of Law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1940 and passed the Judicial Department of the Higher Education Examination in 1941, and before he was appointed as a judge, he was an assistant in the Law Department of Kyungsung University, as a'grant from the merger of stock companies' (株式會社の合併における交付金) was published in the dissertation of the Gyeongseong Emperor Law Association. At that time, his thesis was one of only two Koreans who published the thesis in an academic journal in the history of the Gyeongseong Empire.

 

In this thesis, the money paid to the shareholders of the merged company along with stocks at the time of a merger of a company is called a merger grant. Here, the legal debate along with the category of the recognition of merger grants for all kinds of money that can be provided in various forms is still controversial today. At that time, he was highly praised by Japanese scholars for his surprisingly clear logic. There are many parts to be taken into account of the pro-Japanese behavior, as a logical paper highly praised by the Japanese was published under a new name, not a paper containing a political or historical point of view. In particular, it is necessary to study and evaluate that he was the target of Japan's most fear by digging into clear logic about the historical errors committed by Jap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hile playing an active role as a representative of the Korea-Japan negotiations after the fall of Japan.

 

After the defeat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 late Hong Jin-ki was appointed as the Deputy Minister of Justice in February 1954 and attended the Geneva Peace Talks held in May as the Korean representative. At that time, he submitted the “14 Principles on Korean Unification” based on the first principles of peaceful unification. Counting these details in detail makes it possible to clearly re-evaluate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that preceded the times.

 

At that time, he blocked the issue of making articles favorable to Japan through the agreement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on the sovereignty over Dokdo in various conventions with clear logic of international law. Afterwards, he established a berthing facility and a lighthouse on Dokdo, and made it possible by placing an emphasis on international law that required the flag to be hoisted. This is an insight that clearly predicted the atrocities in Japan today.

 

In addition, the Dokdo Museum, which opened on August 8, 1997 on Ulleungdo with the support of the Samsung Cultural Foundation, is a very precious historical space. The story of the late director Jong-hak Lee, a bibliographic scholar who collected historical materials throughout his life until the museum was born, and served as the first director of the museum, also contains a lot of valuable content.

 

Also, amazed at the fact that there was no painter who painted Dokdo in our history, he visited Dokdo in 1977 and painted Dokdo with the spirit of the Korean people. Since then, a 50,000 won bill dedicated to Dokdo for his entire life. National consciousness is also a legacy that must be preserved forever. We will organize them as soon as possible.

 

Finally, I inform the Japanese government and intellectuals. It is clear that the misconduct of disregarding Dokdo as its own territory by renaming Dokdo, the territory of a empirical nation with such a long history, will be a historical error that will in the future bear the harsh burden on his descendants. You should be aware. The precious spirit of our nation, who has protected Dokdo through the long history, will clearly remind you that your cunning tricks, such as Sasang Pavilion, are truly compassionate illusions. artwww@naver.com

 

*Writer: Ilyoung Lee

Director of the Korean Art Center. Columnist. poet. artwww@naver.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 기사를 후원하고 싶습니다.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큰 힘이 됩니다.
후원금은 인터넷 신문사 '브레이크뉴스' 발전에 쓰여집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